「0개의 기둥」, 2022 글/ 추성아 인간이 대지 위에 무언가를 구축하는 행위에서 가장 처음으로 드러나는 형상은 기둥을 세움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실질적인 공간을 세우기 위한 역학적 함의를 전달하는 구조체로서만 작동하는 물리적인 관점에 머물지 않는다. 구조물로서 주변과의 관계성을 고려했을 때 형상을 세운 조각은, 주위의 ‘모습’과 함께 호흡하는 태도를 내포하며, 공간의 체계에 포섭된 하나의 완전체로서 조각과 공간이 건축의 맥락 안에 들어오게 된다. 김주리의 개인전 《0개의 기둥(0 Columns)》에서는 작가가 지속적으로 실험했던 ‘모습(某濕, Wet Matter)’이 갖고 있는 구축적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형태에서 함의하고 있는 축적된 시간의 감각들을 추적한다. 김주리의 조각은 대지 위에 하나의 기둥을 세움으로 시작되는 건축의 기원과 닮아 있다. 여기서 구축 행위로서의 기둥은 조각적인 태도로 이어지며, 구조를 세우거나 덩어리를 직조하고, 표면을 깎는 등 그 과정에서 철학적이고 조형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전시 《0개의 기둥》은 장막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주름 조각의 맥락 위에 파생된 물질 덩어리들이 분리되어 조각과 건축 사이에 응축되고 다시 생성되는 유동하는 시간에 주목한다. 이는 김주리가 참조하는 인류와 역사가 산출한 모든 정형과 비졍형의 대상에서 비롯되는데, 대상이 담고 있는 질감과 형태의 ‘모습(某濕)’들을 바탕으로 직조되어 과거와 현재의 감각들을 축조하는데 있다. 마치, 죽지 않은 유령을 소환시킨 거대한 무덤이자 우리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혹은 가장 보고싶은 무언가를 덮고 있는 장막으로 기이한 상황을 연출한다. 그러한 점에서 제목에 명시된 숫자 ‘영(0, zero)’은 고정된 수(數)보다 하나의 거대한 조각이 복수의 것을 가능하게 하고 휘발하는 동시에, 축적된 무형의 감각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 혹은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양극의 변수들을 수렴한다. 작업의 태도에서 수렴되는 축조된 기억과 감각을 실시간으로 품고 화석화 되는 상반된 속성은, 조각에서 드러나는 규모와 장소에 위치시키는 초인적인 노력과 재료의 탐구로 직결된다. 특히, 복수의 덩어리들로 구성된 이번 연작은 ‘원시화’의 경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대 거석 문화를 연상할 수 있다. 예컨대, 과거에 거석을 옮겼다는 것 자체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마술적 속성을 불러들이는 수단이듯이, 장소가 갖는 의례적인 성격을 몇 배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덩어리를 ‘거대화(gigantism)’하는 환상적이고 묘한 감각은 조각과 장소의 상징적인 만남을 바탕으로 발현되는데, 본 전시에서는 이같은 거대화에 주목하면서 젖은 흙의 물성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지점이 확장된 공간과 뒤섞이고 분리된 혼성의 풍경에 주목한다. 또한, 복수의 덩어리들이 주변과의 상호관계로 작용하거나, 특정 공간에 세워질 경우에 그 경계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각각의 덩어리의 질감과 윤곽, 부피, 크기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이들이 만났을 때 비로소 공간을 갖기 시작하고 경계의 의미를 찾게 된다. 공간과 조각의 경계 사이에 흩어지고 모이는 시간은 왜곡되고 불완전한 형태와 물성으로 드러난다. 반면에, 형태는 유동적이지만 의식적으로 흙이라는 가변적인 물질을 굳건히 유지시키는 김주리의 이중적인 태도는 시간을 박제하기 위한 의지를 대변한다. 복수의 하얀 표면과 느슨한 형태의 전환을 시도하는 전시 《0개의 기둥》에서 선보이는 연작은, 물질 자체가 형상이 되도록 물성을 의도적으로 재구성한다. 거대한 중력의 한 덩어리로 설 수 있도록 둔탁하고 습윤한 물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재조합한 물성에는 물리적으로 중요한 속성들이 부여된다. 즉, 날 것의 응축된 덩어리에서 젖은 대지와 ‘살(flesh)’과 같은 표면을 연상하게 하는 근원적인 물질은 직접적으로 작가의 신체가 개입된 소조(塑造)의 형식을 취해 ‘주름’이라는 장치에 의해 인식하도록 한다. 예컨대, 젖은 흙 표면 위에 소조한 주름은 시선을 가로막는 전체 시야에 숨통을 트이게 하는 역할을 하며, 형태를 인지하기 이전에 덩어리 뒤에 무엇이 있을지 파악할 수 없는 표면 그 자체로서 훑도록 유도하므로 대상을 지시하거나 실시간으로 지각할 수 있는 ‘상태’에 주목하도록 한다. 여기서 관찰자에게 표면에 가까이 서서 질감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물질의 실체를 파악하는 물리적 거리를 감각하는 시간이 주어진다. 이때, 표면의 틀을 본다는 것은 표면과 표면의 관계 속에서 질감에 주목하기에 앞서, 표면의 물리적인 위치를 파악한다는 점에서 가시성에 대한 인식이 전복되는 순간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 《0개의 기둥》은 의 ‘상태’가 흙이라는 입자들이 인공적인 재료와 조합되어 젖은 상태가 고안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재료의 원본에 대해 질문해 보도록 한다. 조각의 근원적인 재료인 흙이 작가의 신체와 연동되면서 드러나는 몸짓은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움직임으로써, 실시간으로 표면과 윤곽을 빚어내면서 형태의 부분들이 직관적인 흐름 안에서 이어진다. 결국에는 작가가 흙의 물성을 유지시키면서 동시에 잠재우기 위한 시도로 흙의 입자가 보유하고 있는 팽창과 수축의 속성을 인정하고, 그 변화를 몸소 수용하는 과정이 곧 작업의 결과물로 이어지면서 미세한 형태를 구축해내는 것과 같다. 이로써, 구조물 위에 직조된 특유의 재료가 구조와 물성의 관계를 드러내고 형태의 본질에 다가가도록 하는 반면에, 김주리가 고안한 물질은 겉으로 재료의 원본을 가장하면서도 그 속성을 거스르는 태도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는 마치 대상의 ‘이치(理致)’를 향한 방어의 제스처일 수도 있는데, 장소와 시간을 감싸고 있는 온, 습도와 같은 비물질의 기억과 감각을 물질화 하려는 방식으로 매체에 잠재적으로 벤 기억과 역사를 감각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0개의 기둥》은, 공간을 숨 막히게 가득 메우는 덩어리의 밀도에서 드러나는 시각적 스펙터클과 물질의 유동적인 속성이 맞물려 작가가 구현해낸 물성의 최대치를 다시 한 번 갱신하게 된다.
「불가해한 조각적 대상에 대하여」, 2022 글/ 권시우 조각에 대한 알레고리적 함의는 점차 희박해지고 있다. 즉 우리는 더 이상 조각으로부터 의미를 도출해내지 않는다. 물론 이는 한때 미니멀리즘에서 통용됐던 ‘특수한 사물specific Object’이라는 개념을 발단으로 삼지만, 초기 미니멀리즘 조각이 무엇보다 공간의 환영성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로 귀결됐다면, 그와 별개로 이제 ‘특수한 사물’은 이미지를 매개로 파악된다. 후자의 경우, 조각은 더 이상 모듈module이 아니다. 공간 상에 반복적으로 배열된 단위들은, 결국 관객의 시점에 반응하는 풍경으로 포착되거나, 풍경의 무수한 세부들로 와해될 뿐이다. 그리고 이때의 세부는 이미지의 산물이다. 이처럼 공간의 환영성은 어떠한 깊이와 밀도도 확보하지 못한 채, 오로지 이미지에 최적화하기 위한 일종의 무대로 제시된다. 만약 ‘특수한 사물’이 그러한 무대에 개입한다면, 그것은 이미지의 역학 관계에 포섭되기를 자처함으로써, 사물로서의 위상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김주리의 조각은 무대로서의 공간을 어떤 식으로든 점유하고 있는가? 《조각 충동》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작가는 오히려 이미지에 대한 거부의 제스처를 취한다. 이를테면 해당 작업은 자신에게 할당된 구간을 거대한 스케일로 차지한 채, 조각의 일부만을 노출하고 있다. 이는 관객의 시점을 차단하기 위한 일종의 ‘장막’으로 기능하면서, 조각이 무대화할 수 있는 여지를 선뜻 무마시킨다. 즉 관객에겐 해당 작업을 전방위하게 파악할 수 있는 권한이 없으며, 결국 거의 암전되다시피 한 공간에 점차 잠식되어 간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시각성의 포기로 귀결되지 않는다. 관객에겐 여전히 (스마트폰과 매개되지 않은) 1인칭 시점이 존재하며, 오로지 그것에 의지해 조각의 일부를 가늠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작업의 스케일에 일순 압도당할 뿐이다. 그와 같은 경험은 마치 코스미시즘Cosmicism을 연상시킨다. 물론 해당 작업은 인간의 존재론을 의문시할 만큼 충분히 거대하지는 않지만, 그와 별개로 새로운 기술을 발단으로 삼아 ‘확장된 시각성’이 일시적으로 오작동하는 경험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사용자로서의 정체성을 위축시킨다. 이처럼 우리에게 1인칭이라는 형식은, 그간 주체를 규정짓던 주관성의 맥락에서 벗어나, 사용자의 전지적인 권한과 대비되는 ‘제한된 시각성’을 대변하게 된다. 작가가 《조각 충동》에서 연출한 의사-코스미시즘은 결국 풍경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풍경을 조감하는 주체의 시야에 ‘장막’을 드리운 채, 그간 소실점을 토대로 재/구성됐던 원근법적인 공간을 선뜻 무효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각은 더 이상 ‘특수한 사물’이 아니며, 심지어 (주체에 의해) 사물로 대상화될 여지도 없이, 불시에 무언가에 집어삼켜진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억압된 풍경은 《0개의 기둥》에 이르러 새롭게 회귀한다. 주지하듯 이는 조각이 원근법과 무관하게 공간을 재편하게끔 유도하는데, 이를테면 본 전시에서 제시된 일련의 작업들은 ‘장막’에서 벗어나, 다시금 풍경 속에 위치하게 된다. 물론 이때의 풍경은 그저 관객의 시점에 반응하기 위해 시각적으로 조절/조율된 뷰view가 아니다. 다만 1인칭에 함몰됨으로써 발생했던 일종의 폐소공포증과 달리, 전시장에 산개해 있는 연작은, 서로를 암묵적으로 지시하면서, 다름 아닌 (자신이 포함된) 공간을 활성화시킨다. 물론 개별 조각은 여전히 거대하지만, 그것이 비로소 ‘장막’의 바깥에 드러나는 순간, 관객은 그간 은폐됐던 의미를 나름대로 가늠해 나가면서, 점차 작업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조각에 대한 알레고리적 함의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일련의 작업들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주름진 표면은, 마치 조각의 내부를 감추기 위해 드리운 물리적인 더께를 연상시킨다. 즉 우리가 암전된 공간으로부터 해방된 이후에 도달한 의미의 관계망은, 풍경 속에 위치한 작업들이 무/의식적으로 매개된 상태에서, 또 다시 의미를 유보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이처럼 조각은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있든 간에, 더 이상 알레고리라는 형식으로 섣불리 수렴되지 않는다. 알레고리는 결국 주체가 어떤 식으로든 해명하기 위한 대상을 요구한다. 반면 김주리의 작업은 주름진 표면으로 뒤덮인 조각의 의미론적인 구조를 철저히 은폐한 채, 결국 그것을 불가해한 대상으로 환원한다. 이는 다시금 코스미시즘의 문제를 재고하게끔 만드는데, 이를테면 해당 장르에서 중요한 것은 우주적 존재의 거대한 스케일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압도당한 채 소외되는 인간의 주체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련의 작업들은 알레고리 차원에서의 독해를 수행할 수 없는 불가해한 대상으로서, 현실에서 조각을 대면하고 있는 관객의 위상을 문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가 연출한 풍경 속에 포섭된 관객은 더 이상 능동적인 주체가 아니다. 심지어 작업들 사이에 형성된 관계는 포스트-미니멀리즘의 맥락으로 귀결될 만한 현상학적인 경험조차도 유도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상 은폐된 의미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주체성을 재/생산하는 과정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만 본 전시에서 주체는 ‘장막’의 바깥에 위치한 불가해한 대상에 대한 일종의 숭고함을 체감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의 숭고는 주체로서의 역량을 상실한 개인과 조각으로 대변되는 객체 사이의 역전된 위계에 의해 발생한 착시나 다름없다. 이는 결국 이미지를 발단 삼아 점차 무대화하는 조각과는 다른 관점에서 당대의 조각성을 재고하게끔 만든다. 즉 일련의 작업들은 조각의 내부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오로지 주름진 표면만으로 앞서 언급한 맥락에서의 가짜-숭고를 연출해낸다. 그런 의미에서 김주리의 조각은 굳이 이미지를 답습하지 않더라도, 이미지와 유사하게 공허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조각으로 승인한 채, 공허의 안팎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조형적인 감각에 주목하게 된다. 코스미시즘으로 수렴되는 조각은 더 이상 물리적인 스케일에 의해서만 좌우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공허를 발생시키면서, 관객을 포함한 주체의 관습화된 실존을 포기하게끔 만든다. 그렇다면 이제 조각을 대면하는 경험은 스스로에 대한 외상을 유발할 뿐인가? 최소한 본 전시는 마침내 1인칭에서 벗어난 관객이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규정하기 위해, 일단 조각이 전개하고 있는 공허한 의식儀式에 압도당하는 풍경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히 종잡을 수 없는 공포에 질려버린 개인의 파국을 상연하는 게 아니라, 일련의 작업들이 암시하는 공허라는 징후를 주체적으로 소화하는 과정에 가깝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레 와해된 인칭을 어떻게 다시금 ‘확장된 시각성’의 문제로 수렴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결로 남아있다. 어찌됐든 이제 중요한 것은 사실상 부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의미를 함축한 채 일종의 블랙박스로 거듭난 조각적 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의 관점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고체의 물, 액체의 땅」, 2020 글/ 앤디 세인트루이스 김주리의 조각적 실천의 핵심에는 존재의 이중성에 대한 지속적인 대화가 자리한다. 작가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다양한 맥락으로 그 형상을 찾아가는 반복적인 주제들—물질성과 순간성, 영속성과 일시성은 풍경과 그것의 끊임없는 변화의 순환 속에 항상 존재한다. 그는 재료와 환경 사이의 상호 관계가 가능하도록 가마에 구워지지 않은 비가공 점토를 주 매체로 사용해 물과 땅의 요소들을 활성화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예술적 개입을 각인하면서도 자연의 과정에 메여있고, 이러한 경쟁적인 영향력에 전제하는 존재론적인 불안정을 주장하면서 전시 공간을 시간의 경과를 구현하는 무대로 탈바꿈시킨다. I. 퇴적 작용 중국 연안 북동 끝에 위치한 단둥시는 중국과 북한 사이의 자연적인 국경을 형성하는 압록강의 진흙투성이 둑을 기반으로 우뚝 솟아 있다. 장벽, 울타리 혹은 분계선과는 달리 침투 가능한 강이라는 경계로 인해 중국인, 북한인, 한국인 등 다양한 집단이 공존하는 단둥이 만들어졌고, 세계적으로 접경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문화혼종화를 가져왔다. 단둥시는 북·중 무역의 수출생산중심지로 기능하며 국경 양쪽 주민들 간의 사회정치적인 구분을 약화하는 등 이들의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확대시키고 있다. 이러한 문화의 융합은 현지 풍경에 고스란히 반영되는데, 단둥시를 방문한 작가는 이 지점에 매료되었다. 압록강은 서한만으로 흘러 들어가 충적토로 이루어진 하구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섬세한 생태계에 필요한 조건을 형성하며 서서히 축적되는 퇴적물은 퇴적 작용은 상류에서 오는 진흙과 토사의 반고체 상태의 기질을 생산하는 땅, 돌, 그리고 바다 간의 끊임없는 교류 과정의 증거다. 때가 되면, 유기물이 누적된 퇴적물은 결국 바위의 형상으로 굳어지면서 흙이 부서진 후 물, 바람 등 자연의 흐름을 타고 운반되어 새롭게 재탄생되는 자연의 순환을 완성한다. 15년이 넘는 작가의 조형 세계를 보았을 때, 퇴적 작용은 가장 최근 작품들을 가득 채우는 적절한 은유이다. 작가가 사용하는 조각적 매체의 근본적인 핵심은 이전과 같지만 그 형태와 규모는 변모했다. 물에서 찰흙 구조물을 용해하는데 집중했던 작가의 오랜 관심은 다양한 종류의 찰흙 형태물을 축적하고 적치함으로써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탁한 액체 부산물을 재구성하고자 하려는 새로운 의지로 대체됐다. 그의 최근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풍부한 진흙 덩이들은 반고체의 구체물들로 융합되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또한 자연의 영속적인 변화의 흐름을 통해 변모한다. 이 조각들은 아직 경화되는 최종 단계에 이르지 않았으며, 아직도 젖은 상태라는 점에서 일시적이다. II. 어떤 젖은 상태 작가는 이번 장소 특정적인 작업 시리즈에 세 개 언어로 된 제목을 붙여 자신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자아내고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영어에서 ‘appearance’ 혹은 ‘shape’로 번역되는 한국어 제목 ‘모습’은 대상을 바라보는 순수하게 형식적인 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작품들의 추상적이고 임의적으로 보이는 시각적 요소들은 이 노력을 좌절시킨다. 관람객들은 작가의 불룩한, 비재현적인 덩어리들과 표면적으로 관여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한다. 전시장 내에서 이러한 형태의 미적 모호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은 최소한으로 사용된 조명으로, 각각의 작품에 넓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보는 이로 하여금 미묘한 윤곽을 완전히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이 조각들은 시각적 특징이 명확하지만 이를 정확히 형언하기 어려워 작품을 마주할 때 부차적 인식이 떠오르게 한다. 쉽게 인식하기 어려운 모습은 관람객들이 이 불가해한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작품들의 물질성과 구성 재료와 같은 다른 지점을 살펴보게 한다. 영문 제목 “Wet Matter”가 작가의 조각적 매체를 고찰하기 위한 질적인 틀을 제공하지만 그것이 젖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물리적 특성에 대한 설명이므로 유의미한 정의라고 볼 수 없다. 이러한 분류는 물질 표면에 단순히 액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 그 안이 포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어떤 것이 젖었다(혹은 축축하다, 습하다, 미끄럽다, 흠뻑 젖었다 등)고 생각되는 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판단이다. 작가의 모호한 명명법은 영어 제목에 ‘matter’를 사용한 것에도 나타난다. 이 또한 엄청나게 넓은 범위의 지시대상을 실질적인 의미 없는 애매한 지명으로 아우르는 또 다른 기표인 것이다. 전시의 한자 제목 ‘某濕’은 적어도 초반에는 더 많은 불확실성을 가져다준다. 한자의 첫 음인 모(某)는 ‘어떤’이나 ‘모든’을 뜻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의 비특정성을 유지하면서 특정 대상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된다. 실생활에서 이 한자음은 특정인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해당인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두 번째 음은 습(濕)으로 영어로는 ‘wet’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다시 영어 제목과 같은 똑같은 의미론적인 곤경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 두 한자의 조합이야말로 조형물들의 본질을 가장 잘 포착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어떤 젖은 상태. 포괄적이고, 환기시키고, 즉각적인 이 명료한 제목은 이미지나 독립체가 아닌 어떤 조건을 설명하며, 본능적 어휘를 통해 작가의 작품들에 대한 고유한 경험을 선사한다. III. 육체적 끌림 작가의 최근 작품들의 형태나 매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각적 수단이 부재하기에 관람객들은 자신들의 인식을 안내해줄 말초 감각에 의존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 이는 불가피하다. 이러한 작품에서 점토의 안정적인 점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시장 내 다른 공간과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의 온도와 습도를 필요로 한다. 이런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조성되는 시원하고 습하고 동굴 같은 분위기는 전시의 4층 공간에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곳에서 울려 퍼지는 쏴 하는 소리,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와 다른 소리들은 조명이 어둑한 공간 내의 라이트모티브(leitmotif)와도 맞아떨어진다. 작가는 거기에 조각들이 자체적으로 내뿜는 자연적인 토양의 향을 보완하면서 후각적 반응을 촉발하기 위한 연필나무 향을 입힌다. 작가의 작품들은 관람객의 감각 기관에 호소할 뿐만 아니라, 참된 의미에서 장소 특정적인 압도적인 물리적 존재감을 과시한다. 각각의 작품은 그것이 설치된 전시 공간의 구체적인 차원과 분위기에 반응한다. 이중 높이의 천장과 두 개 층의 갤러리 공간을 합친 메자닌 발코니는 작가로 하여금 거의 7m에 육박하는 거대한 수직적 조각 덩어리를 구성하게 하여 그 압도적인 크기로 관람객을 왜소하게 보이게 한다. 조금 더 수수한 공간은 방 너비만큼 큰 단일 조형물로 이등분되어 관람객들이 양쪽의 좁은 공간을 비집고 지나가게 한다. 또한 가늘고 긴 4층 공간에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작품은 12m 길이로 길게 늘어져 전시장 한쪽에서 다른 쪽까지 걸어가는 관람객들과의 지속적인 만남을 이어간다. 하나의 장소에서 작품 전체를 관람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조형물들의 압도적인 규모는 각각의 공간에서 인지적으로 극대화된다. 작가의 엄청난 집합체는 대립적이며 인상적이고, 관람객들이 준수해야 하는 조건을 규정한다. 즉, 관람객은 걸어서 감상하는 경험을 통해 각 조각의 규모와 관람객의 몸 사이의 직접적인 신체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겸허하며 은밀한 육체적 상관관계는 이들 조형물들에 숨겨진 부피감을 본능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따라서 관람객이 작가의 거대한 작품에 맞게 자신의 위치를 계속해서 바꾸는 동안 이 무생물의 찰흙 덩어리들은 그 자체로 점점 더 하나의 몸으로 간주된다. 의인화된 관점에서 보면, 다소 규정하기 힘든 이 조형물들을 가장 잘 환기할 수 있는 방법은 이들이 보여주는 촉각의 질을 통해서다. 조형물의 가죽과 같은 질감과 밤색 색상은 동물 가죽 표면의 빛을 연상시키며, 이들 표면을 광내는 촉촉한 습기는 습한 여름밤 긴 산책을 한 후 흘리는 얇은 층의 땀과 유사하다. 이 찰흙 조형물을 둘러싸고 있는 투과성 ‘피부’야 말로 촉촉한 막을 힘차게 당겨 골이 지게 짠 골조를 노출하거나 고유한 내부 구조물에 느슨하게 걸치는 등 이들의 무형의 실루엣을 착각하게 만드는 익숙함으로 이들을 채워준다. 작가의 조형물 내외부를 가르는 이 물결 모양의 단층이 내뿜는 촉각적 매력은 반짝이는 표면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주름과 능선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며, 피부의 추상적인 지형을 살아 숨 쉬는 풍경으로 변화시킨다. IV. 전환 중 시간은 시간의 흔적이 남은 대상이나 물질과 상관없이 자신의 방식으로 경과를 표시한다. 사람이 늙으면서 피부 탄력이 떨어지고 주름이 깊어지듯, 우리를 둘러싼 세계도 지속적인 물리적 변화를 겪는다. 비록 자연의 변화가 한 사람의 생에 있어 감지하지 못할 만큼 미미할지라도, 지리적인 시간의 측면에서 이러한 점진적인 변화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형태의 풍경을 선사할 것이다. 지구 지형의 장기적인 변화들은 주로 생성과 파괴의 물질인 물의 영향을 받는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물은 수많은 식물 종의 성장에 필수적이며, 이 각각의 식물은 지구 얇은 표면 위의 유기적 질감이 생성되는데 작게나마 기여한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물은 돌을 흙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촉발하며 빙하의 이동 및 침식 등을 통해 그 파괴력을 발휘한다. 지질 작용이 계속되면서 어느 순간 점토가 생성된다. 분해된 바위 입자, 무기질과 물이 결합된 점토는 그 물리적 속성 때문에 변천하는 물질이다. 습할 때는 말랑말랑하고 건조할 때는 잘 부러지며 고온에 노출되면 단단해진다. 작가의 신작 설치 작업을 위해 조합된 도자기 점토는 그 농도는 유체이지만, 각각의 작품 표면에 얇게 펼쳐 작업한 후에도 흐르거나 위치가 바뀌지 않을 정도로 두껍다. 액체와 고체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점성 물질인 점토는 단둥시의 인간적·생태적 지리가 집적된, 다원주의와 일시성이 변증법적인 혼종성을 제시하는 소우주 그 자체이다. 경계 혹은 전달자이건, 생성자 혹은 파괴자이건, 압록강과 그 퇴적물은 각기 다른 요소들을 통합해 하나의 통합된 조건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단둥시의 변화하는 풍경의 본질을 이룬다.
「질료성 체험의 새로운 단계, 김주리 작가」, 2020 글/ 김남수 플라톤은 시인추방론을 펼쳤지만, 스스로는 시학적인 것의 언어로 온갖 생성의 장소이자 우묵한 공간으로서 ‘코라’[Khora]를 이야기했다. 시학적인 것이란 로고스[말씀]의 권능으로만 수렴되지 않고, 거기에 뮈토스[상상력]와 파토스[에너지]가 어우러진 채 혼돈[混沌]의 힘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혼돈은 당연히 이목구비가 없어서 감각할 수 없으면서도 춤과 노래를 즐긴 신이라고 한다. 그것은 ‘코라’를 예찬하는 춤과 노래일 수밖에 없다. “가믈고도 가믈토다”[玄之又玄]. 김주리 작가의 전시 은 3개의 작품들이 모두 호흡을 하는 거대한 생명체처럼 설치되어 있다. 송은아트센터 전층에 걸쳐서 이 환[幻]에 가까운 숨결은 작가의 의도를 살려서 제작되었고, 관람은 그 생명체가 살아있는지 원초적인 의문을 갖고서 그 숨결 가까이 다가가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마치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이나 생물학자 자크 모노가 “외계인이 지구에 당도했을 때, 생명체와 무생명체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몇 가지 기준 – 상동기관과 상사기관의 식별 등 – 을 제시했던 것이 이 관람에서는 자꾸 상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품들은 흙과 물이 각각의 엘리멘탈 미디어[elemental media, 원소 미디어]로서의 본래적 특성을 지니면서도 그 분자적 결합에 의한 새로운 상태로 생성되었을 때, 그러한 기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이 명백해진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전시 관람은 일단 관람자가 마치 저기 어스름한 호리존트까지 걸어가서 그리스식 커튼 –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가 겨뤘던 ‘재현’의 극단적 형태 – 처럼 보이는 작품을 마주하면서 시작된다. 이 주름 장식이 하단까지 물결치는 듯한 작품은 어떤 현실적인, 현실에 근사한 재현으로 보이지 않으며, 되레 작품 제목으로 제시된 중의적인 언어의 트릭에 대한 힌트처럼 보인다. 즉 커튼의 형태를 하고 있기에 통상 시각적 대상으로서의 ‘모습’에 대한 암시인 동시에 그러한 모습이라는 가시성 너머의 잠재적인 것으로서 ‘젖은 물질’을 환히 밝히려는/은폐하려는 의도가 나타난다고 하겠다. 당연히 후자의 ‘젖은 물질’ 쪽으로 작가의 (비)조형적 비중이 기우는 것 같지만, 여전히 ‘모습’이라는 시각적 대상으로서의 지속 혹은 연속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있다. 즉 ‘젖은 물질’이 갖는 ‘코라’로서의 성격, 모든 구체적인 생성을 위한 질료[hyle]로서의 모태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적 ‘원시주의적’ 오브제 같은 위상을 폐기하지 않는다. 김주리 작가의 의도는 이 재현적 ‘모습’과 ‘젖은 물질’ 사이의 균형을 가급적 유지한 채, 전시장 2층으로 오르기를 원하는 것이다. 판단중지 상태에서 현상학적 시선으로 두번째 작품을 만날 때, 이제 ‘젖은 물질’은 1층의 커튼 형태가 하단에서부터 상단으로 이어지고 있음의 상기와 함께 그 이어짐이 무한할 수 있음에 가닿게 된다. 이는 2층에 설치된 작품이 뭐라고 판단하기 힘든 규모의 더미로서 흙과 물의 결합은 형식인 동시에 내용이며, 담는 것이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잉태하기 위하여 안으로 담긴 것이 되는 듯 보인다. 즉 ‘코라’의 이념은 이 2층에서 흙더미의 표면을 녹이면서 그 표면을 혼돈이나 제강 같은 신격이자 정의하기 힘든 괴수가 숨쉬는 피부처럼 나타나게 한다. 여기에서 이미 ‘모습’과 ‘젖은 물질’ 사이의 균형은 깨어지며, 기관이 없는 이 거대한 몸체를 구성하고 있는 불변성과 불가해함이 환기된다. “물은 흙의 죽음으로 살며, 흙은 물의 죽음으로 산다.” (헤라클레이투스) 김주리 작가는 흙, 물, 검게 물듦, 녹아내림, 소멸, 귀환, 존재의 집 같은 키워드로써 살펴볼 수 있었다. 그의 출세작 에서 엿보이듯 인간의 역사, 특히 근대화와 그 이후의 퇴락한 건축 풍경이자 시간의 아카이브처럼 보이는 건축물의 역운[역사적 운명]이 물의 파괴적 힘에 의해 녹아내리는 일종의 물질적 퍼포먼스로 과거와 현재 사이의 교차시간적 경계지대를 드러내왔다. 그 경계지대는 소멸의식이 서서한 시간 속에서 마치 제의처럼 진행되는 식역[liminality] – 분리와 재결합 그리고 경계화의 영역 – 이었다. 경계지대는 흙이 물을 빨아들인 검은 섹터이자 그 섹터가 하단을 스스로 붕괴시키며 위로 움직이는 일종의 생명체처럼 작동하는 영역이었다. 이는 장소로서의 벽체이자 사물의 몸체가 고유 환경, 공동체, 시간의 무의식 등을 수동적으로 폐기하면서 파국을 맞이하는 퍼포먼스였다. 이는 1970년대 이후 한국에서 건축법이 바뀌면서 슬라브 지붕의 다세대주택이 무한히 건축되었고, 그 무한증식하는 건축이 대부분 ‘건축가 없는 건축’이자 ‘이웃의 집을 모방한 건축’이라는 사실이 그러한 파국적 특이점과 그 특이점의 계속되는 이동 – 파괴와 소멸을 동반한 이동 – 에서 특징적이었다. 왜냐하면 김주리 작가가 하이퍼리얼하게 편집증적이며 강박적으로 재현한 그 미니어처 건축물들은 익명의 민가주택이었고, 그럼으로써 “존재의 집”으로서 “생활세계”[umwelt]의 거처가 되는 이 집의 표상은 한 시대의 건축적 모나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나드[monad]란 한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 같은 매체를 뜻한다. 그러한 모나드가 물에 녹아서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본래의 ‘바다진흙’처럼 되돌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문명비판적이면서도 동시에 생성론적이기도 했다. 이 ‘바다진흙’은 죽은 식물과 동물의 부패한 잔해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빛의 작용으로 흙의 특정성분이 물과 결합한 것이라는 것이 19세기 의 주장이다. 여기에는 여전히 근대 이전, 혹은 고대적인 물질론의 발상이 깃들어 있는데, 김주리 작가의 이번 전시에는 이처럼 빛의 작용이 지대하게 개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 라는 명제처럼 빛과 더불어 사운드 역시 결정적으로 이 ‘바다진흙’의 역운처럼 보이는 식역에 작용하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상동 관계나 상사 관계 같은 기준에 의한 사이버네틱스 – 동물과 인간 그리고 기계 사이의 동형적인 자기조직화 과정을 탐문하는 기술과학 – 적인 관행, 다시 말해서 1960년대 이후 미디어아트와 함께 발동되기 시작하는 미디어의 관념은 이 전시에서 유효하기 어렵고, 그보다는 훨씬 광대한 시간적 주름운동, 가령 몇 만년전의 조산운동이나 앞으로 몇 십년 후의 (대홍수를 포함한) 기후변화 과정이 즉각적으로 상상되며, 교차시간의 속성으로 개입한다. 이를 기존의 용어대로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하거나 ‘숭고’ 개념으로 엮는 것은 부당한 것이며, 정확하게 ‘상서의 미학’으로 접근해야 한다. ‘상서’[祥瑞]란 시간의 흐름 한가운데 내재적으로 몸 담고 있으면서 그 시간적 추이 속에서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개념이다. 즉 길[吉]한가, 불길[不吉]한가. “모든 생명체의 기원인 근본 진흙은 바다 진흙이다.” (로렌츠 오켄, 1809) 테오리아[Theoria] – 시각으로 봐서 알게 된다는 뜻의 그리스어 – 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모더니즘과 그 이후의 시각과 달리 상서의 미학은 질료적인 모태가 ‘코라’로부터 시간 속에서 변해갈 때 그 변화하는 것의 상서로움을 묻는다. 이는 ‘숭고’와는 다른 것이며, ‘바다진흙’으로 되돌아간 원소가 다시 그 ‘바다진흙’으로부터 새로운 생성의 잠재적인 것을 현현시키는 과정의 가치와 의의를 생각하는 것이다. “상서롭다”라는 것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 (비)조형적인 조형의 ‘모습’으로부터 그 사물적 에피파니를 체험하는 일이다. 전시는 3층까지 이어지면서 이러한 은은한 빛과 소리에 감싸여 숨을 쉬는 듯한 기이한 자기조직화의 생명성 징후를 체험하게 된다. 어두운 조도, 마치 낯선 천체의 낮은 중력 하에서 산책하는 듯한 표면 질감, 의식을 놓으면 금세라도 변성의식 상태[altered states]로 빠져들 것 같은 긴장감이 그 숨쉬는 흙의 체험을 구성한다. 플라톤이 말한 ‘코라’라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김주리 작가의 작품을 음미하다 보면, 그 개념은 결국 ‘흑암’이라는 사실에 다다른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흑암’에 대한 가치판단을 괄호로 묶어낸 중세회화를 참조하면, ‘흑암’의 표면 위에 드리워진 빛의 성격과 그 어둠 속의 빛이 갖는 권능이 그 격에 걸맞게 환히 밝혀진다. 이는 불길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본래적으로 상서로운 것이었다. 그토록 김주리 작가가 이번 작품들, 물과 흙의 원소적 결합이 생명을 제공하는 물질로서의 물과 그 물이 품고 있는 심연의 성격을 강조하게 된 것에는 이러한 접근이 하나의 재해석이 되지 않을까 한다. 한편, 뒤늦게 관람의 포인트로서 환입되는 것은 작가 자신이 이 흙의 출처이자 과정으로서 특정한 토포스를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중국 단둥 지역의 대지 풍경을 선택하여 그 습지 식생을 하나의 시간적 과정으로 참조되면서 그 지역이 위에서 말한 경계지대임을 숨기면서 드러낸다. 한반도와 만주, 범한인계와 범한족계, 하나의 한국과 두 개의 조선 등의 구분선은 이 경계지대의 흙의 특정한 상태가 왜 ‘젖은 물질’로서 현전해야 하는가를 의미하고 지시한다. 이 토포스적 정치이자 정치적인 것의 토포스로서의 흙이라는 매체는 김주리 작가가 등의 작업에서 일관되었던 역사적 가치의 은밀한 평가와 “역사화하라”(제임슨) 라는 수행성의 실천이 여전히 축축하게 배어있음을 증명한다. 이에 따라 흙이라는 질료는 발효 숙성 과정, 식물적 혼합 과정, 공업적 공정 그리고 흙과 흙 사이의 길항 과정 등등이 지난하게 이어지면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지미술에서 흙을 재료로 할 때, 가령 로버트 스미스슨이 소용돌이 형태로 조형하고 호숫물에 잠겨들게 하여 자연과 미술 사이의 구분선을 무화시키면서 더 이상 현대미술의 대상물로 보지 않게 했다는 설정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김주리 작가의 작업에는 대지의 특성이나 상징 기호, 자연과 연루된 의미망 같은 수렴처가 없으며, 그 자체의 ‘흑암적’ 확장 내지는 잠재적인 것의 증폭이 강하게 여며져 있다. 오히려 의미를 안으로 머금으며, 쉽게 언어적 포획에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할까. 그럼으로써 구체적으로 식별되지 안는 비형태의 형태, 거대한 규모, 언어가 탈구되는 뮈토스적 접근이 우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고대의 형상, 질료적 조물의 질서, 그리하여 지금의 문명으로 세팅되기 이전, 바야흐로 ‘축의 시대’[Axial Age]가 설치되기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선조성’(퀑탱 메이야수)의 현실을 여기 가만히 구현해놓은 것 같다. “영구히 마르지 않는 물기”의 상태의 연출이 빚어내는 위상학은 시간축선 위에서 태초의 조건을 불러다 놓는 느낌이다. 빛과 소리 그리고 표면의 환[幻]이 가하는 관람 체험은 분명히 교차시간의 에피파니가 강하게 딸려나온다.
「김주리 작가론 - 장소의 흙이 가진 로컬 내러티브와 역사, 그리고 여행자로서의 예술가」, 2020 글/ 김남수 김주리 작가는 ‘장소’라는 기억의 매개적 영역을 건드리면서 미술관 공간으로 흙덩이를 들여온다. 이 흙덩이는 구체적인 ‘장소’로부터 유입된 것이며, 이 유입의 형식은 전혀 아방가르드적이지 않다. 오히려 아방가르드가 1968년 이후 포스트모던이라는 파상성과 혼합주의에 자리를 내주면서 ‘시간’이라는, ‘시간의 교차성’이라는 주제로 자체의 뼈대를 드러내는 것과 대조적으로 김주리 작가는 ‘공간’이라는, 이 선험적 형식을 차지하는 미술관 전시장에 ‘장소’로부터 연관되는 흙덩이를 들여놓아 구불구불한 지리적 여행을 암시한다. 실제로 작가는 끊임없이 여행을 하고 있으며, 지금처럼 20세기 후반부터 정립된 전자미디어의 글로벌화로 인해 시공간 압축 현상이 가져온 ‘장소 상실’ 그리고 ‘경험 결핍’이 작가들의 일반적인 현존의 속성으로 자리잡는 것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는 굉장히 경험주의자의 태도를 견지하여 그로 인해 시대착오로 오인될 여지가 있음에도 아랑곳없이 어느 지역의 특정한 흙덩이를 만지고 있으며, 그 흙덩이가 가진 질감을 느끼고 있다. 모든 것들이 빠르게 시간예술화되고 있고, 그로 인해 시간의 얼굴(들)을 우리의 주어진 현실의 매트릭스로부터 그 명확하고 전투적인 형식으로 드러내는 매체 – 가령, 싱글채널 영상 매체 – 가 전시의 일반적인 선택으로 자리잡는 것과는 다르게 작가는 공간의 권능을 극단화하는 거대한 메스 형태의 흙 재료 위주의 작업을 펼쳐가고 있다. 이 공간축선에서 지리철학[Geo-Philosophy]적인 태도로 땅바닥에 배를 깔고 지그재그식의 기기를 거듭하는 뱀과 같은 동물적인 행동학이 시간의 얼굴(들) 드러내기에 직접 연관된 작업들과 다르게 “시간은 신의 소관처럼 여겨지는가 하면, 공간은 피조물의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라는 식의 저 바닥으로, 저 아래로 낮게 몰락하는 ‘노예의 도덕’(헤겔)과 유사한 에토스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뱀이 의식을 치르듯 구불구불하게 좌우 곡선을 꺾으며 동시에 예측할 수 없이 땅의 바닥을 쓸면서 그 온도와 먼지를 덮어쓴 여행을 하는 것이 ‘노예의 도덕’이 갖는 전복적인 성격이며, 이는 ‘주인의 도덕’이 주어진 현실과 사물의 질서에 복속하여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면서 승리하고자 하는 판과는 전혀 다른 선상에서 이루어진다. 즉 뱀과 같이 여행하는 방식으로 흙덩이를, 구체적으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흙덩이를 겪는 감각에서 전자미디어와는 유다른 미디어, 즉 전통적으로 엘리멘탈[Elemental, 원소]이라고 불리워온 미디어에 재접속하는 것은 질료의 상서로운 측면을 느끼는 것인 동시에 여행하는 예술가가 질료 자체와 동일화되어가는 경험이기도 한 것이라 하겠다. 최근 송은아트센터 3층 전체 전시장을 점유한 전시 에서 흙덩이들의 현실화된 형태, 상형문자의 출현 없이 그 잠재력의 원천으로 되돌아가서 자연의 어둠 일체를 분별없이 생각하게 하는 형태를 3점의 작품들로부터 접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 작품들의 내재적 경험의 질적 요소는 작가의 실존적인 내러티브로부터 들려져야 하는데, 전시장에 마치 안개처럼 분무되는 일종의 스펙트럼 음악은 단순히 소멸하고 멸망하는 사물들이거나 그 종언에서 다시 시작으로 소환되는 사물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하늘, 공기, 물, 땅 그리고 그 원소들 사이의 경계가 정치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벌거벗은 삶의 차원에서 구분지어지고 다시 무화되며 동시에 날카롭게 경계지대로 출현하는 과정들에 대한 모호한 증언이자 고백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증언이자 고백은 지극히 사적인 로컬 내러티브를 터뜨릴 만한 작가의 여행이 뒷받침되고 있고, 그 여행의 결로부터 흙덩이의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이 목적론 없이 전시장에 여며져 있다고 할까. 늘 축축한 상태로서 생명의 자연발생의 조건처럼 흙덩이가 자기조직화의 과정에 들어서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과정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아주 특정한 로컬 내러티브의 톤과 음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두더지 – 사회적 참여를 하면서 혁명의 꿈을 버리지 않은 작가는 ‘두더지’(마르크스)로 표상된다 – 같은 방식이 아니라 뱀 같은 방식으로 여행을 한 지역은 중국의 만주 지역으로서 중국과 북한 사이의 단둥이라는 땅이었다. 그곳에서 작가가 탈북하는 사람들이 밟은 땅의 흙덩이, 그 바닥의 암울한 일상, 낱낱으로 분산된 채 환멸에 빠질 수밖에 없는 벌거벗은 삶의 침잠에도 젖어들었지만, 무엇보다 국경이라는 선이 갖는 비애의 감각 속에 그러한 정치적인 무의식, 정서적인 기호들이 고스란히 여며지고 동시에 흙덩이를 중심으로 한 풍경 – 바람 풍, 햇빛 경 – 에 귀속되고 통합된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단둥의 흙덩이를 중심으로 한 풍경이 그대로 전시 속에 레디메이드 형태로 도입된 것은 아니지만, 그 풍경의 본질과 흙의 질료적 느낌이 풍경의 알레고리로서 표현되었다고 할까. 그로부터 단둥 지방을 여행한 작가의 경험이 직접적이면서도 우의적으로 흙덩이라는 원소 미디어를 통하여 역운[역사적 운명]의 그림자처럼 나타난다고 할까. 이는 작가의 여행 경험에서 배태된 그 무엇이 단둥 지방과 송은아트센터라는 전혀 다른 장소들을 묶으면서 동시에 본래 선험적인 ‘공간’이 아닌 영역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하겠다. 김주리 작가는 2017년 사루비아다방에서 진행한 전시 에서도 위의 전에서 드러난 양상과 유사한 과정이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즉 이 전시에서 작가는 어둠의 허공에 매달린 달이 물 위에 달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종의 수월[水月]의 풍경을 기본 골조로 하여 그 풍경이 장소화되는 연극적 설정에서 쑥과 야생의 잡풀 그리고 백묘국 등의 식물들을 습지에 설치하였다. 여기서 백묘국은 작가가 일종의 개인적인 심적 유보나 기억의 유예처럼 되어 있던 것이 우연과 필연을 따른 재출현의 에피파니 현상을 겪으며 거기 그 자리에 삶의 솟구쳐오르는 탄생과 거꾸러지는 소멸의 아이콘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즉 작가는 유럽의 어느 작은 도시를 여행하던 중에 싱그럽게 살아있을 적에는 백색을 띠고, 죽음을 맞이했을 적에는 녹색을 띠는 식물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의식의 수면 아래로 잠복했던 그 식물이 서울의 어느 골목길에서 우연히 재발견함으로써 어떤 확신에 가까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이중등록되는 경험은 여행이 아무리 뱀과 같은 모험의 여정을 꾸린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의 전사[前史]로서만 기능하고, 다시 돌아온 익숙한 장소에서 반복되는 인지의 경험으로 그 전사의 여행이 재인지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결국 김주리 작가는 수월[水月]이라는 동아시아적 미학의 장치를 장소화된 설치로써 접근하지만, 그 보편적인 장치의 이면에서 울려나오는 로컬 내러티브는 유럽과 서울을 관통하여 삶의 탄생과 소멸을 심연 속으로 빨아들이는 백묘국을 통하여 나직히 토해내진다. 백묘국의 삶과 죽음, 그 과정의 스펙트럼에서 달이라는 불멸 역시 물 위의 수많은 복제에도 불구하고 유한성의 풍경을 배운다고 할까. 죽음 의식이 ‘장소’라는 매개된 영역을 빨아들이면서 어떤 권태나 회의에도 간과할 수 없는 삶의 근본 문제에 직면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고 할까. 이러한 전개 과정에서 작가의 여행에서 두 개의 장소들이 서로 내포되고, 그 내포의 형식으로 백묘국과 같은 매체가 고딕적이지 않고 숭고하지 않은 방식으로 개입한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여행, 두 개의 장소(들)과 연결, 연결고리로서 매체 감각, 장소에 얽힌 풍경의 감각과 역사, 현실의 상태가 전시장으로 전이되는 현상 등등이 김주리 작가에게는 기본적으로 다양한 변주 계열의 작업을 펼치면서도 여전히 눈에 띄는 일관성의 구도이다. 이는 작가가 2011년 제10회 송은미술대상 수상의 전에서 이미 본성적으로 내재화된 것인지 모른다. 작가가 경희대, 외대 인근의 휘경동 일대의 다세대 주택을 하이퍼리얼하게 흙 재료로 세공한 작품들을 수반[手盤] 위에서 물분자의 파괴적 스며들기에 의해 천천히 소멸되어가는 과정, 시간적 추이의 과정을 체험하게 한 연출은 서로 다른 역사시대를 거대한 전환의 선이 이동하면서 소멸의 축을 중심으로 드러내고, 감각적으로 흙과 물이 상호대화하는 연인들의 발라드처럼 굉장히 의미심장했다. 1960년대 박정희 근대화와 함께 도시의 건축적 조밀도와 풍경이 바뀌는 것과 함께 건축법이 바뀌면서 지어지는 다세대 슬라브 주택 -- 1980년대 이후 서울의 중하층 민가주택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건축가 없는 건축’이자 ‘민간적 상상력이 개입하는 건축’으로서 삶의 표상적 성격이 강한 주택 – 이 휘경동이라는 ‘장소’의 패러디로서 ‘휘경’[輝景], 즉 “휘발되어 날아가는 풍경”이라고, 장소의 중력을 여전히 느끼면서도 그 기체적인 날아감을 통한 여행의 잠재성이 한껏 안으로 여며진 형식이면서 동시에 이러한 형식이 물의 분자적 결합과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바다진흙 – 그리스 신화에서 모든 것을 만드는 기본 질료 – 으로 회귀하기 위하여 소멸되는 비-형식의 형식이란 것이 절대모순적 정신의 현현으로 보였다. 장소에 붙박히면서도 동시에 그 장소로부터 이탈하는 소용돌이가 느껴지는 풍경, 그것이 죽음의 느낌일 수 있는 풍경이라는 것이 그 정신성의 정체라고 할까. 거기에는 작가가 휘경동이라는 ‘장소’에 근거하여 세계의 무가치함과 허무함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이란 이처럼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이 체험하는 것이고, 무엇인가 이질적인 것이 갑자기 백묘국처럼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다. 2016년 경기창작센터 레지던시에 참여한 작가는 이러한 여행의 감각으로 그러나 ‘노예의 도덕’이 갖는 우울을 드러내면서 본관 건물 3층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자주에 가까운 해질녘의 하늘은 사위가 어두워져 갔고, 작가는 체인스모커로서 그 어둠 속에 잠겨드는 공간을 응시하고 있기 일쑤였다. 지하인간처럼 “휘경”의 마력에 사로잡혀 수수께끼 같고 비밀 많은 동굴처럼 음습한 그 스튜디오에는 어디서 퍼왔는지 모를 흙덩이가 한가운데 놓여 있었고, 그때는 그 흙덩이가 여행의 신비론적 매체라는 사실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물질적 질감이 그 내부의 계단을 숨기고 있고, 그 계단을 따라가면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는 ‘장소’로의 진입이 있고, 그 ‘장소’에서 삶은 죽었다가 다시 모든 것이 무화[無化]되는 순환질서 속에서 뱀처럼 기존의 낡은 껍질을 벗고 다시 기기 시작한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김주리 작가에게 여행은 그런 것이었다.
「생멸의 형이상학」, 2019 글/ 구나연 보이지 않으나 존재를 가늠하는 가장 강력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시간일 것이다. 시간은 무한을 본질로 갖고 있으면서 세계를 유한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진다면, 결국 시간과 물질은 세계를 있게도, 또 없게도 하는 것이다. 김주리의 작업은 존재와 관련된 이러한 형이상학과 강력히 밀착하고 있다. 그의 작업 중추의 지점에는 생멸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가 담긴다. 그리고 이는 그가 선택한 질료의 속성이 시간과 물질이라는 이중성을 함축하고, 이 질료로 이루어진 작품 자체가 생성과 소멸을 스스로 수행할 수 있도록 놓아둔다. 그에게 질료는 마치 고대의 그리스 철학이 세계의 근본적 물적 토대로 여겼던 물과 흙, 공기와 바람과 같은 원초성과 시간이 함께 만들어내는 자연의 어휘를 갖는다. 2010년대 이후 김주리의 주된 모티브는 풍경의 재현을 통한 시리즈와 건축물의 생멸을 다룬 작업들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시리즈는 각기 다른 이중적 상태와 연계한다. 먼저 은 작가가 직접 풍경과 마주했던 경험의 순간과 그 기억의 이미지를 통해 하나의 환경을 만든다. 그러나 이는 경험의 재현을 통해 추체험 하게 되는 구상적이고 전통적인 미술의 접근방식과 다르다. 은 그의 신체와 감각이 접한 현존과 찰나의 미끄러짐을 이미지로 붙잡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이 지닌 감각적 '상태'를 경험의 공간으로 온전히 체현한다. 어느 한때의 자연이 지니고 있던 물과 흙과 풀과 돌들이 어두운 공간 속에서 빛으로 나타난 가운데, 실제 미처 알아채지 못할 속도로 조금씩 변화하는 환경의 음향이 우리를 감싸 안는다. 이 풍경의 무대는 기억이라는 감각적 총화이자 하나의 온전한 장면이지만, 그것은 검은 물 위에 더욱 또렷하게 비친 반영과 같이, 그의 기억이 투명하게 도달한 한 겹 너머의 풍경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느 공간에 겹겹이 마련된 생성과 소멸의 시간 가운데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곳은 작가의 경험의 순간과 기억이 지속이라는 시간의 두 속성 사이에 자리한다. 거기에서 대기는 빛, 물, 흙이 어우러진 향을 품은 채 순환하고, 물이 점차 땅에 흡수되며 변화하는 고요한 역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 있으면서도 풀숲 사이로 들리는 음성이 스스로의 소진을 암시함을 알지 못한다. 이 풍경의 공간은 형성의 역사와 상실의 역사 모두를 아우르며, 천천히 또 은밀히 이루어지는 생명의 필연성을 담은 존재론적 상태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은 경험과 기억, 실제와 반영을 동시에 지닌 시간의 공간이며, 그 내부는 서서히 진행되는 생멸의 메타포로 채워진다. 이 같은 존재론적 묵시는 그의 작업의 일관된 성찰로 보이며, 작품을 이에 대한 물적 환원으로 변모하도록 만든다. 시리즈는 그가 여러 나라의 건축물들을 재현하고 그것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과정을 목도하게 함으로써, 단단한 대상의 세계가 향하는 본래적 귀결을 함축한다. 그가 만드는 건축물들은 흙과 물이 합쳐져 적당한 질감이 되는 찰흙을 소재로 비롯된다. 예컨대 인도에서 제작한 의 경우, 인도의 신화에 나오는 신을 위한 궁전과 실제 건축물을 결합하여 빚은 섬세하고 거대한 스케일의 건축물에서 출발한다. 건축물의 리얼리티를 위해서는 사실과 신화를 부단히 리서치 하며, 섬세한 세부를 놓치지 않도록 노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작가는 건축물이 가장 온전한 상태로 전시장에 자리 잡은 그 순간, 바닥에 서서히 물을 붓는다. 그렇게 고인 물이 건축물의 하단부터 조금씩 스미며 침식이 나타난다. 이 여정은 모두 녹아 본래의 흙 상태와 건물의 잔해가 뒤엉킨 폐허가 될 때까지 계속된다. 물과 흙이 만나 완성된 생성의 물질이, 또한 그에 내재하는 파기의 물질이 되는 이중적 속성은 생명과 죽음의 동시성을 표상하는 것임과 더불어 세계의 존재함이 지향하는 필멸의 인과를 담고 있다. 이에 대해 김주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흙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은 인위적으로 부어지는 물에 의해 다시 침식되어 녹아내리게 된다. 흙과 물이 만나게 되면서부터 작가인 나 는 그 과정에 전혀 개입할 수 없다. 오롯이 그 둘의 상호작용으로 작업이 진행된다. 물은 생명을 상징하지만 삶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은 물을 필요로 하지만 때로 모든 것을 뒤덮고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작품에서 ‘물’ 은 파괴자인 동시에 작업을 완성해주는 존재로서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김주리 작가 노트 중에서, 2018) 그의 작품은 어느 순간부터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작동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이 향하고 있는 변화의 상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건축물이 서서히 종국을 향하는 점진적 과정, 즉 길지 않은 한 시점이다. 하지만 작품의 어떤 상태와 마주하건, 건축물은 과거와 미래 모두를 실현시키며 현존한다. 따라서 오랜 시간 걸쳐 구축된 아름다운 대상이 스스로 조금씩 사라지는 모습은 그 앞에 선 모두에게 너무도 쓸쓸한 일이며, 오늘의 일상 속에 익숙해진 시대적 광경이자, 세계와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 생의 변이를 목격하는 일이다. 김주리가 만든 건축물은 결국 세계의 존재 방식에서 추출된 하나의 형상이지만, 또한 그 안에서 진동하는 시간의 원칙을 확인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하여 그의 작업이 조금씩 그 모습을 달리하며 무너져가는 것에서 자연히 우리의 육체를 유추하게 된다. 이것은 김주리의 이전 작업인 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의 건축물이 우리 몸에 불러일으키는 사고의 흐름은, 그의 작업이 육체에서 건축물로 나아간 방향과 교차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교차 중심에는 육체와 객체가 공통으로 환유하는 살아 있음에 대한 실존적 물음이 놓인다. 김주리의 작업은 세계와 우리의 현현에 관한 존재론적 사유를 대체하여 수행한다는 점에서 강함 힘을 갖는다. 이는 작가가 미술이 응당 지녀야할 물질적 조건들을 힘겹게 구축했다가, 이를 다시 스스로 포기하는 뼈아픈 과정을 담보할 때에 나타난다. 그가 만든 건축물은 또다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으며, 온전한 완결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사라지기 위해 만들어지고, 다시 생성되기 위해 무너져 내리며, 단 한 번도 똑같은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통해 그의 작업은 시간을 호흡하며 생명을 지닌다. 그가 형성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생의 서사는 스스로의 생명력을 통하여 사멸을 향해서도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이 선택하는 소재가 지닌 물적 성질에서 시작하여 소멸의 지점에 도착할 때까지 그 생의 철학은 섬세하게 확장된다. 하나의 견고한 유기체와 같이, 우리는 그의 작품이 내쉬는 날숨의 음향을 직접 들이마시기도 하고, 눈앞에서 미세하게 움직거리는 생의 상실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적 경험이 현존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의 순간이 되는 것은 그의 작품이 지닌 원초적 지점, 즉 생멸의 형이상학을 통해 가능하다.
「‘휘경’의 완성, 혹은 ‘관객 없는 전시’라는 유토피아: 김주리 론」, 2017 글/ 곽영빈 "협업(collaboration)이 답이다. 하지만 질문은 뭔가?" 배음 좋은 첼로 연주가 종종 그렇듯, 파워 큐레이터로 유명한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이 전도된 수사는, 공연장에서 돌아와 자리에 누운 청자의 귓가를 떠나지 않고 귀찮게한다. '답을 찾았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한가?'라는 그럴듯한 반문 역시, 소위 '좋은 작품'에 수반되는 '좋은 답안지'의 한계, 즉 ‘익숙한 질문‘에 대한 답이기에,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지 못한다는 아이러니를 외면할 뿐이다. 이에 반해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제기한다'는- 질 들뢰즈의 유산을 충실하게 수행한 미국의 철학자 아비탈 로넬이 정의한 매우 엄격하고 근본적인 의미에서- '바보 같은' 김주리의 최근 작업은 주목을 요한다. 아니 보다 엄격하게 말하면, 그녀의 작업은 "주목을 요한다"는 표현에 내재된 시각성(‘눈目을 두다注‘)은 물론이거니와, '관객'을 위해 제공되는 '시각적 대상'이라는 '미술 작업'의 전제 자체를 독자적인 프로토콜을 통해 의문에 부친다는 의미에서 ‘바보’같다. 우회라는 첩경 그러므로 이 작업의 중핵에 이르는 '첩경'은, 오히려 그럴듯해 보이는 '오독'들의 나열일 거라는 가설에서 출발해보자. 예를 들어 '자연과 죽음,' 혹은 '폐허와 생명'. 작가 김주리의 이름과 작업을 검색하면, 이 열쇠말들을 변주한 글과 감상문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대표작이라 할 연작들이 웅변하듯, 그녀의 작업들은 무너지고, 짓이겨져, 결국 사라져버릴 구축물들을- 종종 컴퓨터를 통해- 정교하게 구현한 뒤 시나브로 폐허화하고, 이를 통해 '인공'과 '자연'의 관습적 적대, 혹은 구분 자체를 무력화시켜 왔다. 현란한 색으로 치장된 웨딩 케잌이 무너지면서 흙으로 만든 시커먼 속내를 드러내고 물에 잠기던 (2004)의 ‘감각의 논리’는, (2005)이나 (2008)에서 역시 흙으로 빚어 곧 형해화될 싸구려 모텔방과 청년 및 노인의 (조각난) 몸을 통해 확장됐고, 이듬해인 2009년 이래 섬세하게 변주되어온 시리즈는 이를 ‘집’이라는 형상으로 집약시킴으로써, 2011년 작가에게 송은미술대상이라는 영예를 안겼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폐허의 벡터’, 혹은- ‘간전기의 계관철학자’라 할 수 있을 발터 벤야민이 시대정신 Zeitgeist의 차원에서 절묘하게 포착했던- ‘자연사 Naturgeschichte'적 경향은, 엄격히 말해 그녀만의 배타적 전유물은 아니다. 예를 들어 (2001)에서 (2008)을 거쳐 (2010)에 이르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기호 (시스템) 자체를 일종의 폐허로 간주했던 구동희나, (2004)에서 (2006)를 관통하던 양혜규, 2009년 김주리와 함께 ‘휘경‘ 전시에 참여했던 일군의 작가들(특히 권용주나 신은경)은 물론,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거행된 안규철의 대규모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무엇인가가 시나브로 스러지고 사라졌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멜랑콜리의 감각은 그 어떤 선언문 없이도 조용히, 하지만 촘촘한 그물망을 통해 다각도로 확장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핏 보면, 2017년의 신작 전시도 ‘휘경’이라는 주제를 다시 되새김질한 것이 아닌가, 싶은 게 사실이다. 이라는 다소 노골적인 전시 제목부터, 평소엔 죽은 것처럼 창백하지만 물이 많아지면 오히려 선명한 녹색을 띠며 죽어간다는 신기한 식물 백묘국을 거쳐, 전시장 안쪽 우측 계단에 걸쳐있던, 마치 녹아 흐르다 멈춰버린 듯한 유기체의 잔여물까지. 그리 크지 않은 지하의 전시공간을 채우던 쑥향과 정체불명의 사운드가 덧붙여지긴 했다지만, 이 역시 결국은 ‘휘발’되어 “사라질 풍경”의 공감각적 변주 아닌가? 사건의 증인 vs. 풍경의 관객 미리 단언하지만, 이러한 유비(analogy)에 근거한 판단이야말로, 김주리가 최선을 다해 빠져나오고 있는 덫이다. 그 덫은 작가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발을 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휘경’이라는 익숙한 벡터의 구심력에 함께 휘말려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 덫은 우리의 덫이기도 하며, 그렇기 때문에 김주리의 근작들이 내뿜는 강력한 원심력을 놓쳐서는 안된다. 이는 무엇보다, 그녀의 근작이 더 이상 ‘풍경’이, ‘재현’이 아니라는 사실과 직결되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것이 지금까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던 ‘휘경’의 근원적 잠재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보자. 그녀의 작업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다. 증거가, 아니 증인이 있다. 체감온도 영하 10도를 오간 전시 오프닝 첫날, 전시장 초입의 차가운 물속에 발을 빠뜨렸다는 어느 관객이 그 증인이다. 그/녀는 어쩌다 빠졌던 것일까? (그/녀 개인의 부주의함을 잠시 괄호쳐두자면) 전시장의 세팅과 조명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바닥 전체가 물로 가득한 상황에서, 스팟 라이트라 하기엔 흐리다 못해 암흑에 가까운 전시장의 (첫날) 조명세팅은, 성인 남자의 어깨 보폭보다 살짝 넓게 만들어진 지그재그 형의 런웨이와 함께 보호 장비보다는 위협의 원천에 가까웠고,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물에 빠진 관객의 이야기를 상당히 조심스럽게 꺼냈는데, 이는 전시장 내부의 부분 조명들이 지나치게 밝은 게 아닌가라는 나의 질문에 대해,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바로 이 첫날의 ‘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퇴‘한 것이라는 설명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이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전시장 안전‘과 그에 대한 ’책임‘이라는 실질적 이슈는 ’작가’ 개인을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 문제의 전시를 ‘풍경’으로부터 탈각시키는 핵심적인 경첩(hinge)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미리 말해두지만, 여기서 관건은 ‘증인 또는 관객’이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다. 다시 묻자. 그 안타까운 피해자는 무엇의 증인인가? 잘 보이지 않는 풍경, 아니 ‘휘발되는 풍경’의 증인이다. 나는 ‘관객’이라 쓰지 않았는데, 이 차이는 중요하다. ‘증인(witness)’과 ‘관객(spectator)’은 상호배타적인 범주기 때문이다. 증인이 있는 곳에 관객은 존재하지 않고, 관객이 있는 곳에 증인은 없다. 증인이 ‘사건(event)'과 연동할 때, ‘관객‘은 ’풍경(landscape)‘과 함께 한다. 전자가 ’사건‘의 불안정성 속에서 요동칠 때, 후자는 ‘재현' 혹은 ‘표상(representation)'의 범주에 안정적으로 머문다. 이런 근본적인 의미에서 ‘사건‘은 ’시각적 대상’이 아니며 ’표상‘은 더더욱 아니다. 앞(ob-)에 던진다(-ject)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대상(ob-ject)'으로서의 풍경은 관객 ‘앞’에 서며, 관객은 그렇게 자기 앞에 선 풍경을 자신 앞에 던져진 ‘시각적 대상’으로 ‘감상’하게 된다. 둘은 서로를 말 그대로 앞(에)세우고, 언제고 다시(re-) 제시(-presentation)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서로를 ‘재현(re-present)'한다. 하지만 사건은 다르다. 사건은 모든 사람들에 의해 똑같이 동일하게 표상되지 않는다. 증인은 자신이 보고 들은 ‘사건’을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재현(re-present)하지 못한다. 첫날 전시장에 빠진 이에게 ‘풍경’은 없었다. ‘풍경이 없었기 때문에 빠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이 ‘풍경‘으로, 즉 시각적 대상으로 존재하고, 다각도에서 향유될 수 있다는 건, 관객, 즉 그것을 보는 주체의 자리가 안정적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프로젝트 사루비아 의 지극히 어두운 조명 아래, 자칫 잘못하면 빠질 수밖에 없을 물과 좁은 런웨이의 조합으로 구성된 전시장 바닥(ground), 아니 ’바닥의 부재‘는 작품은커녕, 주체 자신조차 세우지 못한다. 자신의 앞은커녕 옆이 어딘지도 구분하기 힘든 어둠 속의 주체는, 자신 ’앞(ob-)'에 ‘던져진 것(-ject)'으로서의 ’대상(ob-ject)'을 가질 수 없고, 정확하게 이런, 즉 잘 보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관객(=보는 사람)이 되는 데도 실패한다. 이번 전시에서 사운드가 갖는 중요성 역시 이러한 차원, 즉 방향성의 상실과 관객의 불가능성이라는 차원에서 음미되어야만 한다. 전시공간에 울려 퍼진 사운드는, 2016년 그녀가 레지던시로 머물렀던 경기창작센터에서 시도한 작업을 전경화시킨 것인데, 흙이 물에 의해 침식되면서 무너지고 으깨지는 데서 나는 소리를 녹음해 증폭시킨 이 소리를 통해 그녀는 이전 작품인 (2008)과 명백한 단절을 수행한다. 더 이상 ‘침범’은 “조용”하지 않다. (2015) 소리도 더 이상 뮤트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그러한 붕괴와 침식의 기호라는 걸 알아들을 수 있는 청중은 거의 없다. 그 소리는 ‘붕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피곤함’을 가리키는 하품소리도, ‘즐거움’을 알려주는 ‘웃음소리’도 아니며, ‘슬픔’을 시사하는 ‘울음소리’도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듣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청각적인 것(l'acoustique)과 존재(l'être)라는 단어를 조합했던 미셸 시옹의 용어를 빌면, ‘생멸‘의 자연사적 과정을 매개하는 시간의 힘은 이렇게 청각적인 존재(‘아쿠스메트르 acousmêtre’)로서 자신을 육화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앞(ob-)’에 '던져(-ject)' ‘대상(ob-ject)’화할 수도, 재현할 수도 없다. 그것은 재현의 기호가 아니다. 증인, 혹은 ‘시-소(See-Saw)’의 딜레마 물론 우리는 사진을 찍음으로써 작품을 ‘대상’화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재현된 대상의 위상이다. 플래쉬가 없이 찍힌 사진 속에 ‘대상’은 없기 때문이다. 어둠에 적응된 우리의 눈은 물 위에 작은 섬처럼 자라난 풀과 계단 같은 공간에 녹다 흘러내린 무언가를 ‘작품’의 일부로 식별할 수 있지만, 플래쉬 없는 사진 속에 그들은 없다. 칠흙(!) 같은 어두움뿐이다. 그렇다고 플래쉬를 터뜨리면, 우리가 그 안에서 봤던 (흐릿한) 대상은 사라진다. 그 말의 엄격한 의미에서 보(이)는 순간 사라지는 이 ‘시소(see-saw)’의 딜레마야말로, 왜 우리가 단 한 명의 피해자를 ‘예외’가 아니라, 이 전시에 본질적인 ‘증인’으로 간주하는지를 설명해준다. ‘풍경을 휘발시키는 것‘, 그것은 근본적으로 ‘관객을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객 없는 미술전시’라니? 앞에서 얘기했지만, 이렇게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제기한다'는 의미에서 이 전시는 ‘바보’같은, 희귀한 전시다. 따라서 앞의 ‘증인’을 예외로, 전시와 무관한 기술적 ‘사고‘의 (경미한) 희생자로 배제한 뒤, 이 전시가 ‘재현‘의 범주로 복귀한 것은 당연하다. ‘관객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처음보다 밝아진 전시장 내부의 조명은 안전한 바닥을 보장하고, 이를 통해 주체가 관객으로 변형되며, 그/녀 ’앞‘에 ’던져진‘ 것으로서의 작품이 시각적 ’대상(object)‘으로 복권되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로부터의 도약 이런 엄격한 의미에서 김주리의 이번 전시는- 메를로-퐁티가 자신의 유작인 에서 썼던 중요한 표현을 빌면- 매우 "좋은 실수(une bonne erreur)"이다. 이 전시는 '풍경이 저기 있다(Il y a le paysage)'고 여기는 순간, 풍경이 '불안정한 것'의 '표상' 혹은 '재현(re-presentation)'으로, 즉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불안'으로 투사되고 궁극적으로 '휘'발된다는 딜레마를 정확하게, 즉 첫날을 제외하고 실패함으로써 구현해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렇게 휘발적인 '이해'를 통해 무엇인가가 '확립'된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작품'이란 언제나, 혹은 최소한 '주체‘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해 '보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관객(spec-tator)' ‘앞에(ob-)' '던져진 것(-ject)'이어야 한다는 전제. 다시 말해 '작품'은 '시각적 대상'이라는 것. 작품은 시각화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정확하게 이런 엄격한 의미에서 작품이란 '관객'을 필요로 한다는 것. 이러한 원환운동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시리즈가 최근까지 유지해왔던 것, 혹은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은 쉬쉬해야만 할 것 같은 사고의 피해자를 ‘풍경의 관객’에서 ‘사건의 증인’으로 변형시킴으로서, 이 근본적인 전제에 균열을 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앞인지 뒤인지 옆인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장쾌한 한 발을 내딛고, 이제껏 주제(topic)와 재현의 평면에서 변주되어왔던 ‘휘경'이라는 김주리의 '토포스(topos)', 즉 장소를 비로소, 다시 말해 처음으로 '완성'한다. 무엇으로? ’관객‘도, ’풍경‘도 없는 ’비-장소‘, 즉 ’유-토피아’로. 여기가 로도스다. 뛰어라.
「어느 사라질 풍경과의 교신」, 2017 글/ 안소연 예상치 못한 풍경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짙은 어둠과 강한 쑥향, 가끔씩 깜박거리는 조명과 정체마저 알 수 없는 소리들이 어떤 장면을 연상시키지도 못한 채 곧장 드러나 버린다. 공간으로 진입하는 통로는 유난히도 협소해서, 우리는 저마다 크기도 가늠할 수 없는 이 모호한 풍경과 홀로 대면할 수밖에 없다. 그 길 끝에서는, 실체 없는 추상적 형태의 움직임이 전체의 풍경에서 감지되는 신호들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감각을 자극한다. 김주리의 (2017)은 하나의 풍경이다.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주목해온 “휘발하는 풍경”, 즉 “휘경(揮景)”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는 (2011-2017) 연작을 통해, 일련의 건축물을 축소하여 그대로 재연한 후 곧 다시 허물어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풍경에서 감지되는 현실 너머의 우연한 신호들을 붙잡아보려 했다. 그의 첫 연작은 재개발이 한창이었던 서울의 휘경동(徽慶洞)을 소재로 삼아, 곧 사라질 오래된 주택의 형태를 본떠 흙으로 모형을 만든 다음 전시가 시작되면 거기에 조금씩 물을 부어 그 형태가 아래로부터 서서히 붕괴되는 과정을 보여줬다. 연작은 작가가 단지 재개발지역에 대한 사회적 이슈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작업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어떤 현실의 풍경이 함의하고 있는 기억과 그것에 대한 비현실적 차원의 감각들을 이야기한다. 때문에 그가 제시하는 어떤 형태의 구축과 소멸 앞에서,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아직 본 적 없는, 하지만 이미 사라진 시간의 기억에 대해 막연한 향수를 갖게 된다. 에서 시작된 풍경에 대한 그러한 관심은 에서 보다 추상적인 사유로 확장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최소한의 장소성을 지시하던 건축적 풍경이 사라진 이번 전시에서, 김주리는 마치 “발견된 오브제들”이 소리 없이 보내오는 초현실적 신호들처럼 풍경의 요소들을 매우 추상적인 시간의 대체물들로 끌어들였다. 이를테면 유럽의 한 작은 도시를 여행하던 중 유난히 창백한 잎이 인상적이어서 한줌 채취해 온 식물을 그는 서울의 한 골목길에서 우연히 발견했고, 그것이 백묘국이라 불리는 야생화라는 것을 알아내 직접 재배하기 시작했다.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의 우연한 만남은, 그에게 어떤 유령 같은 신호로 작용했고 죽은 듯 창백한 이파리가 물이 많으면 오히려 선명한 녹색을 띠며 죽어가는 백묘국의 언캐니한 모습에서 물에 의해 무너져 내리는 “휘경”의 맥락을 감지했다. 공간을 가득 메운 마른 쑥향과 가늠할 수 없는 공간 너머의 소리 또한, 절대 풀리지 않는 이 풍경의 모순을 한껏 가중시키고 있다. 김주리는 도시로부터 외딴 곳에 떨어져있는 한 레지던시에 입주하면서 그 주변에서 서식하는 들쑥을 보며 반복되는 낯선 풍경들 속에서 비현실적 차원의 상상과 마주해야 했다. 일체의 무언가를 감추듯 강한 향으로 위장하고 서 있는 이 식물은, 낯선 풍경에 잠재된 원초적인 것 혹은 사라진 기억을 다시 불러들일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신호체계다. 한편 공간을 소리로 가로지르는 수많은 음의 파장들은 대체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몇 광년 떨어진 어느 우주와의 교신처럼, 이 어처구니없는 상상의 수신음은 풀기 힘든 암호와도 같다. 무언가 타들어가는 소리 같다가도 거대한 원시림에서 무언가가 생성되고 움직이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풍경에서 눈을 돌려 공간 모퉁이에서 연신 흘러내리고 있는 듯한 어떤 형태의 모습이 이 신호음과 포개어지면, 이 낯선 소리는 무언가가 붕괴되어 사라져가는 장면에서 또 다른 감각을 자극하게 된다. 이를테면, 매우 폭발적으로 사라져가는 어떤 형태가 우리에게 보내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 역동적인 소리의 파장들은 매우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곧 소멸을 예고하는 불안한 신호의 실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가늠할 수 없는 이 비현실적인 소리의 정체는, 연작에서 일련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친 후 남겨진 메마른 흙의 파편들에 다시 물을 부었을 때 그 사라진 풍경에서 채집한 미세한 소리의 파장들이다. 그 미세하고 비밀스런 소리가 이번 전시에서는 또 다른 경험의 실체들 속에서 증폭돼 서로 교차하면서, 이 낯선 풍경에 잠복되어 있는 생성과 소멸의 표상을 새롭게 환기시킨다. 꽉 찬 원형의 달빛이 검은 수면 위에서 가끔의 미세한 파동에 일시적으로 제 형태를 완전히 놓치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현실의 풍경에 잠복되어 있는 서로 다른 시간의 경험들, 현실 바깥으로 사라질 풍경들이 보내오는 무수한 신호들, 그러한 비현실적인 사건들과 교신할 수 있는 한 주체의 마술적인 감각에 대해 계속해서 말을 건다.
「유기적 창조에 관한 역설」, 2015 글/ 정현 김주리의 작업은 흙으로 빚은 소조를 기반으로 한 사회문화적 현상부터 관념적 질문까지를 아우른다. 작업 전반을 아우르며 사용되는 질료는 흙과 물이다. 이 두 질료는 형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사용되지만 그 자체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체이기도 하다. 흙과 물의 관계는 변증법적 관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업 전반에 스며있는 생명의 순환과 생태주의적 사유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제가 바로 흙과 물의 조응에 의해서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용해 효과 자체가 유난한 장관을 만들어 내거나 특별히 새로운 발견은 아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김주리가 작업을 통해 사유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있다. 사실 그의 작업 대부분은 재현적인 면이 강하다. 특히 그를 대표하는 작업으로 꼽히는 “휘경”은 유난히 재현성이 강하게 드러나기에 이 작업은 작가의 정체성을 강하게 만들어주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를 제약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그의 작업실에서는 재현적인 장면보다 오히려 여행 중 촬영한 사진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비온 뒤 숲에서 찍은 퇴적층과과 수면의 움직임을 찍은 사진들은 개발주의의 휘둘림으로 스러져가는 1970년대 건설된 개성 없는 동네의 주택을 재현한 작업 “휘경”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업은 늘 이면을 가지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앞서 글로 밝힌 것처럼 김주리의 작업은 생명의 순환을 다루고 있으며 재현적 요소들은 관념적 사유를 감추는 기제로 볼 수 있다. 관념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려는 의지이며 삶을 구체화하는 이야기와 그에 따른 해석과는 달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바뀌지 않는 진리이다. 김주리의 소조 작업은 겉으로는 단단하게 보이지만 물의 개입은 건조해져 움직이지 않는 흙의 입자들의 잠을 깨우고 서서히 움직임을 부추긴다. 김주리 작업의 두 번째 역설은 여기에 있다. 파괴에 의한 창조는 자주 사용되는 구절이지만 물에 의해 되살아난 원소들의 움직임이 형상을 허물어뜨리는 작용은 참으로 이중적이다. 원소의 운동성이 거세질수록 형상은 사라지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현상을 추상화(abstraction)라 부르지만 이는 인간중심의 시각일 뿐이다. 형상이라는 개념 또한 결국 인간에 의해 창조되었을 테니 말이다. 창조를 위한 탈주 파괴가 생성을 부추긴다는 역설은 탈문명주의자들에게는 꽤나 매력적인 전복일 것이다. 작가가 현대문명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지에 관해서는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 그러나 최근작 “잠자는 물의 노래”(2015)는 지하 공간의 습도와 반응하도록 얼기설기 조합된 점토를 공기 중에 내버려두고 벽면에는 물과 흙이 서로 섞이는 과정을 담은 영상을 보여준다. 드디어 김주리는 형상과 재현이라는 경계를 넘어선다. 물론 형상과 재현에 모종의 혐의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건 이전 작업의 강력한 기표 작용이 작가의 보이지 않는 지문과 같은 의도를 초월하면서 나타난 문제가 자연스레-마치 공기가 통하지 못하도록 꽁꽁 싸맨 비닐봉지가 벗겨진 것처럼- 또 다른 용해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만남은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와 하나가 서로 만나 무조건 새로운 하나를 다시 생산하는 것도 아니다. 만남의 경계에서는 언제나 매우 역동적이고 위험한 교환이 일어난다. 단번에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충돌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세계는 서로에 대해 서서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에너지의 변환 과정을 지시하는 엔트로피를 연상시킨다. 김주리의 작업을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상정해서 분석하면 모든 현상이 매우 명확해진다. 에너지의 질량은 다른 에너지로 보존되지만 실제로 에너지는 다른 에너지로 소멸된다는 엔트로피의 법칙은 문명에 의한 개발주의의 폐해로 비유할 수 있겠다. 지구의 생태를 이용해 현재와 같이 개발과 재개발의 반복하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환경 파괴는 이미 예견된 미래일 것이다. 개발 논리를 강하게 비판한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문화와 엔트로피의 법칙을 비교하면서 문화는 지속적으로 환경을 파괴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이에 반해 일본의 학자들의 견해를 예로 들면서 그는 “만일 한 문화가 햇빛과 흙과 물의 상호작용을 꾸준히 향상시키면 그 문화는 전체적으로 우주에 긍정적으로 기여한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 다른 영상 “휘경”(2015)은 건물을 재현한 소조가 시간과 물에 의해 퇴화하는 과정을 촬영한 작업이다. 제목처럼 경치로 부를 법한 건물이 흩뿌려지듯 소멸한다. 문화와 문화가 서로 만나 신선한 자극과 새로운 역동성을 생성한다면 그것만큼 바람직한 만남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보다는 시장논리에 의해 종속되고 결국은 오래된 고유한 문화마저 그 형태를 기억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연작은 사라져가는 과거의 기억을 감상적으로 기억하는 작업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양식, 유형, 낱말로 대체되는 에너지-기운의 변곡점을 추적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그가 몇 년간 잠행을 했던 이유 중 하나도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로 작업이 소비되는 상황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들뢰즈의 탈주선 이론은 자본주의에 의해 구성된 현대사회의 징후들이 만든 사회적 외상을 우리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하나의 사상이다. 들뢰즈가 그토록 예술의 해방을 강조한 이유도 이 탈주선과 무관하지 않다. 아마도 그는 사회적 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하는 유일한 탈출구를 예술(특히 문학과 영화)로 보았다. 그가 예술을 해방이라고 부른 이유는 예술이 기존의 관료주의 체제와 일방적 제도로 구축된 사회에 저항하는 기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을 진정한 참여로 보았다. 단순히 예술 안에서 자유를 향유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사회 속에 숨어 있는 자유를 향한 잠재태를 꺼내는 행위를 예술가의 참여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김주리의 작업을 되돌아보자. 김주리는 이미 존재하는 낱말과 같은 재현-이미지의 해체하면서 우리 삶에 잠재되어있는 파괴의 불안을 가시화한다. 서서히 소멸되는 기억과 장소는 재현적이지만 동시에 이는 실재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실재에 내재하는 불안과 운명을 재현한 것이다. 김주리의 탈주선은 사라질 운명에 처한 주택에 잠재하는 온갖 기억과 상처를 창조하자마자 파괴시키면서 이미 시작된 셈이었다. 한 번 소멸된 것들은 절대로 다시 복원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불가능한 상태로 탈주를 시작했다. 이제 탈주는 현재 원소들의 운동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의 작업은 빛과 흙 그리고 물의 조우에 의한 생성이 엔트로피의 법칙을 넘어 어떻게 상호교환적인 유기성을 드러내는 데에 있는 듯하다. 덧붙이기 김주리는 말이나 글보다 온기와 습도로 인지하는 게 훨씬 편하게 보이는 작가이다. 그의 작업이 부침을 겪고 존재론적 질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글을 마치기 전, 작가에게 제안을 하고 싶다. 이제부터는 빛, 흙, 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원소들의 강도, 질, 시간, 기원 등을 찾아내고 보이는 것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지각하게 만들어야 할 때인 것 같다. 지각 불가능한 것들을 지각 가능한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예술가적인 삶이 아닐까.
「압축 재생된 이접의 지대」, 2011 글/ 이선영 흙으로만 만들어졌으며, 물이 첨가되어 중력의 작용을 받아 아래로부터 서서히 침식되어가는 김주리의 집들은 시간에 의해 스러져가는 것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집은 현대인이 대다수 몰려 사는 도시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주변 환경이라는 점에서, 환경 변화에 대한 척도가 되어주곤 하지만, 김주리의 경우 처음 관심사는 몸이라는 내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집 또한 몸의 연장이라고 할 때, 이 작업의 시작 중 하나가 무너져 가는 몸이었음은 필연적이다. 몸 또한 흙과 먼지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변화는 우리 주변 환경이 변하는 속도만큼 빠르지 않다. 몸과 그것의 외화인 집은 1차적으로 자연력에 의해 쇠퇴해 가지만, 몸보다도 더 빨라진 집의 갱신 주기는 왜 이렇게 미친 듯이 파괴되고 또 건설 되는가에 대한 사회적 물음을 끌어들인다. 존재론적인 문제는 의식하고 의도할 사이도 없이 곧장 일상을 지배하는 거시/미시적 권력의 문제로 비약한다. 미술작품에서도 도시의 변화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이 적지 않게 반영되고 있는 가운데, 김주리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강도와 밀도는 그 출발이 존재론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은 외적 접근이 아닌, 작가에게 체화된 내재적 문제의식만이 작품의 폭과 깊이 또한 유지,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킨다. 그렇다고 작가가 기초적인 자료 조사나 재현 과정을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니다. 김주리의 작품은 경쾌하게 치고 빠지는 가벼운 풍자나 냉소주의와는 거리가 있으며, 사회 현실에 대한 지식인적 관념주의나 이데올로기에서 보여지는 비판적 접근과도 차이가 있다. 단순한 동병상련이나 자신과 거리가 먼 현실에 대한 연민에 머물지도 않는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그렇다는 태도이다. 작가는 가혹한 현실에 보다 잔혹하게 대응한다. 낡은 집의 외벽 타일 무늬까지 완벽하게 재현한 다음, 그것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과정은 사회 현실에서 발견되는 폭력과 다를 바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작업하는 삶 자체가 잔혹하다. 집들이 그토록 완벽한 형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무너짐은 그토록 강렬한 느낌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의미는 그 낙차에서 발생한다. 요즘 작업이 시작되었던 2009년에 작가에게 벌어진 사건은 어느 날 옆집이 참혹하게 뜯겨진 현장이었다.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붉은 벽돌집의 반파 된 잔해에는 내장처럼 살림살이가 다 나와 있었다. 추스릴 새도 없이 파괴된 집은 그와 더불어 파괴된 삶을 떠오르게 한다. 집은 인간을 보호하는 소우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지만,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진 집은 일상에서 진행 중인 차가운 전쟁을 떠오르게 한다. 4년 전에 열린 전시의 제목 ‘조용한 침범’처럼 말이다. 갑자기 폭격 맞은 듯 파괴된 집은 작가로 하여금 그것이 허물어지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게 했고, 흙으로 만들어진 집의 축소형은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한눈에 압축해서 볼 수 있게 했다. 처음에는 옆집이었지만, 시야를 돌려보니 그러한 사건은 (재)개발 공화국의 편재하는 현실이었다. 정책이나 경기의 순환주기에 의해 생겨난 집들은 공간을 빠르게 잠식하고 기대수명을 채우지 못한 채 빠르게 사라진다. 그러나 개발이 이루어지는 시간대의 차이 때문에, 어느 지역은 지체 현상을 보이고 곧 사라질, 또는 사라져줘야 하는 과도기적인 풍경으로 남게 된다. 이전 작업인 [휘경] 시리즈에서 작가는 재개발 예정지인 휘경동 풍경으로부터 ‘휘발하는 풍경’을 보았고, 작업실이 있는 동네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흩어진 재개발지 풍경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이번 ‘스케이프 컬렉션’(전시부제) 전은 전시장이 있는 한남동 지역을 대상으로 했다. 남산과 한강 사이에서 멋진 조망 권을 가진 한남동 지역은 주거지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완연하게 갈라지는 동네이다. 널직널직하게 세워진 ‘언덕 위의 하얀 집’들이 모인 부자동네 반대편에는, 이전의 낮은 슬레이트 지붕 집을 밀어내고 1970-80년대 새로 지어진 저층의 붉은 벽돌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아마도 탁 트인 조망에 어울리는 고급빌라나 아파트를 목적으로 재개발될 예정인 그 장소들은 언젠가는 완전히 갈아엎으리라는 기대로 인해, 큰 공사가 아닌 자잘한 보수들로 연명하면서 최초의 구조와 형태가 차츰 변형된 곳이다. 그래서 곳곳에 작가의 눈을 끌만한 진기한 생활의 발명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언덕에 있는 그 동네는 한쪽은 4층, 한쪽은 1층으로 된 계단형의 집이나 외벽 없이 ‘따로 또 같이’ 스타일로 붙어있는 집들, 지형이나 땅의 형태에 맞춰진 자연발생적인 집을 비롯, 밀집된 집들 사이의 미로 같은 가파른 골목들이 모세관처럼 뻗어있다. 김주리의 작품에는 어느 날부터 동네의 언덕을 잠식했었을 비슷한 스타일의 벽돌집들은 서서히 변형된 흔적들이 담겨진다. 계획된 인공구조물은 자연화 과정을 밟는데, 작품은 이 과정을 압축 재생하는 것이다. 동질적 몸체를 서서히 변형시킨 이질적인 요소들은 감추어져야 할 병적인 징후가 아니라, 드러내야 할 생성의 흔적들로 강조된다. 낡고 좁은 집들은 시간에 흐름에 따른 공간의 변화, 가령 덧대어지고 집적되며 증식되는 구조들로 포착 된다. 가파른 삶의 굴곡 면을 따라 집들은 끝없이 이어지며,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공간은 그자체가 이접의 연속체이다. 잡초처럼 생명력 있게 뻗어나가는 리좀적 형태들이다. 작업을 위해 작가가 모아놓은 풍경 사진들에는 밀집된 집들 사이로 어지럽게 얽혀있는 전선줄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또한 근경의 곁가지들처럼 보인다. 리좀의 구조는 미로처럼 길을 잃게 하지만, 리좀이 만들어내는 미로적 구조는 목적을 잃은 효율을 위한 최단거리가 만들어내는 폭력을 유예시키는 방어막이 되기도 한다. 1/50이나 1/30로 축소한 모델을 통해 무너지는 과정이 극적이다. 이 시간적인 과정은 사진이나 드로잉을 통해서도 표현되었다. 집을 만든 후 하얗게 코팅하여 무너뜨린 후 찍은 사진 작품은 물에 의해 갈라진 표피들이 내부의 살점들과 대조되면서 표현 수위가 더욱 자극적이다. 복도에 걸린 드로잉에는 난간들로만 연결된 구조가 있다. 서로 다른 구조가 시점을 달리하면서 리좀적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우연적 연결망은 누군가에게는 정리되어야 할 무질서로 보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수에게나 유토피아를 제공할 새로운 질서와 대조되는 헤테로피아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헤테로피아는 ‘주어진 사회적 공간에서 나타나는 희귀한 공간들이며, 그 기능이 다른 것과 다르거나 심지어는 정반대’(푸코)이다. 그것은 ‘사회적 결정이라는 뿌리로부터 해방된 공간적 이미지’(데이비드 하비)를 가진다. 총체적으로 계획되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덧붙여진 구조들은 다소간 무원칙적으로 보이지만, 모두가 필연적인 것들이다. 거기에 그것이 있어야할 이유들이 반드시 존재한다. 이 자연화 된 풍경에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여분의 것들이란 없기 때문이다. 작업과정은 집을 짓듯이 치밀하다. 컴퓨터상에서 3차원 도면까지 그린 후에 제작되는 것도 있다. 작은 스케일로 낡은 문틀과 창틀 같은 집을 이루는 요소들을 틀로 만들어 놓고, 백토로 만든 판에 찍어 거의 사실에 가까운 형태의 집을 만든다. 마지막 단계는 전시 오픈이나 그 전날 물을 부어서 아래로부터 서서히 침식시키는 과정이다. 물과 흙이 만나 반응하는 속도에 의해 파괴의 정도는 다르다. 물을 많이 부으면 2-3일 안에도 스러진다. 물과 중력으로만 변화가 일어나기에, 물의 양은 전시 기간에 따라 조절한다. 백자토로 만들어진 축소모델은 외관이 정확히 재현되어 있지만, 색은 흙색 그대로이다. 그것은 집의 알맹이를 그대로 드러내려는 것이다. 거의 와해되어 터와 흔적만 남은 것도 있다. 무너진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현대판 유적지 같다. 이 전시의 대표작은 축대 위에 7-8채가 붙어있는 집들이다. 닮았으면서 약간씩 다른, 가족유사성을 가지는 집들은 전시장 창문에서 보이는 실제 건물을 모델로 했다. 그러나 완전히 똑같지는 않으며, 건물의 특정 요소로만 이루어진 환상적 구조물도 있다. 입구도 출구도 없이 난간만으로 이루어진 집이나, 데칼코마니처럼 분열중인 벽돌집은 증식의 방식을 예시한다. 무성생식처럼 분열하는 방식은 원초적이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전달한다. 개체가 증식되는 과정을 담은 이러한 환상적 모델은 굳이 무너뜨릴 필요는 없다. 그것은 구조체의 형태를 갖추고는 있지만 이미 무너져 있거나, 무너진 파편들 속에서 불사조처럼 일어나는 힘을 상징한다. 작가는 왜 그리 누추하고 궁색한 풍경에 주목하는가? 그것은 그러한 풍경들이 하나의 유일하고도 객관적인 시공간 개념을 배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 또는 삶의 굴곡 면을 따라 펼쳐지는 중층적 표면들은, 강력한 하나의 깊은 뿌리와 기둥을 가지면서 격자형으로 뻗어나가는 지배적인 권력에의 의지를 거스른다. 오랜 세월동안 미세하게 뻗어온 삶의 그물망은 어느 날 한꺼번에 걷어 내어져야할 쓰레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시공간적 경험을 담은 이러한 구조물들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하나의 힘(권력)에 의해 한시적인 생명만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다양한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 사회에서 독특한 실천으로 남아 있으려는 예술에 가해지는 폭력과도 유사하다. 김주리의 작품은 타자가 타자의 편에 선 경우에 해당된다. 추상적인 힘에 의한 구체적인 자리의 소멸은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불가피한 과정인가? 그러나 자연력처럼 다가오는 폭력은 정당하지도 불가피한 것도 아니다. 물을 쏟아 부음으로서 자연의 과정을 가속시키는 행위는 그 파괴력을 자연에만 한정시키지 않는다. 물과 흙으로만 생성되고 소멸하는 광경들은 자연이 아니라 사회적 풍경인 것이다. 인간 사회는 자연력을 그들의 기준으로 조정한다. 사회는 하나의 힘에 대해서만 합법성과 효율성을 인정한다. 김주리의 작품은 구체적 특수성이 그대로 새겨진 삶의 자리들이 추상적 보편성에 의해 사라지는 모습을 담는다. 이 추상적 힘은 소수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자본주의의 경향에 의해 발생되고 강화된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자본은 과정이지 사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본은 상품생산을 통한 사회적 생활의 재생산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본의 내재화된 작동규칙은 자본이 쉴 새 없이 사회를 변형시키는 역동적이고 사회조직 양식임을 확인한다. 그 과정은 위장과 물신화를 거듭하면서 파괴를 통해 성장을 이루며, 새로운 욕망과 소요를 창조하고 인간의 노동과 희망의 가능성을 착취하며 생활속도를 가속화시킨다. 공간의 생성과 파괴는 자본의 순환주기에 의해 가속화 된다. 그러나 자본은 과잉축적의 문제를 낳는다. 과잉 축적에 기반 한 성장은 더 많은 빈곤층을 낳는다. 문제는 과잉축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비는 과잉축적의 위기 이후에는 강렬한 심미적 움직임들이 뒤따른다고 본다. 젊은 작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장소에 대한 트라우마는 사라져가는 삶의 풍경과 그 세세한 굴곡 면을 응시하는 심미주의 경향을 낳았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부동산’으로만 인식하는 세대와는 다른 감수성을 가졌다. 이들은 토착민의 삶의 뿌리를 뽑고 어디선가 이식된 하나의 나무와도 같은 동질적 체계에 타자들을 질서 있게 복속시키려는 거대한 흐름에 거부감을 가진다. 그러나 압축성장을 구가하면서 생겨난 한국의 부동산 자본주의의 성공 신화 역시 점차 퇴색하고 있다. 김주리의 작품은 자본이 추동하는 공간의 추상화에 대해 구체적 삶의 특수성이 녹아있는 자리를 부각시킨다. 한편 이 자리들이 녹아내리는 과정은 공간이 시간화 되는 현대사회의 경향과 조응한다. 도시는 다양한 인터페이스로 뒤덮이며 ‘시간의 통합성이 따르지 않는 공간의 통합성으로 인해 도시는 첨단기술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시간적 체제 속으로 사라진다’(폴 비릴리오) 마치 서서히 침몰하는 배처럼 보이기도 하는 김주리의 작품은 공간이 시간으로 내파되는 과정을 표현한다. 내파는 붕괴라는 다소간 비극적인 방식으로 귀결되지만, 작가가 작품을 통해 되살려낸 삶의 미세한 그물망들은 시간의 파괴력에 대한 내구력 및 저항력 또한 암시한다. 난간으로만 이루어진 집이나 집을 이루는 건축적 요소들이 이접적으로 연결되는 드로잉은 삶의 그물망이 생성되는 방식을 알려준다. 붕괴되는 건물들은 단편들 및 잔여물들을 남겨놓는데, 이것들은 접 붙어서 새로운 구조를 형성한다. 그것은 통일적인 설계도에 의해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부분들이 덧대어진 형식으로 만들어지며 하나의 전체를 이루지 않는다. 그것을 추동하는 것은 당면한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계속 이어가려는 욕망이다. 계획된 도시가 유기적 전체를 이룬다면 부분들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앙티 외디푸스]에서 말하듯이, 큰 덩어리를 이루는 유기체와 대립하는 죽음의 표본이다. 이질적으로 접 붙어지는 단편들은 영원히 지속될 삶의 번영이 아니라, 매순간 죽음을 의식하는 하는 삶을 전제한다. 단편들은 모든 방향에서 또 모든 방면에서 무한한 것과 연결됨으로서 죽음을 지연시킨다. 작가가 주시한 장소들은 이러한 욕망이 작동하고 있다. 이 욕망이 기이한 연결들을 낳는다. 연결들은 즉석에서 만들어지며 발명된다. [앙티 외디푸스]는 근원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의미가 문제가 아니라, 오직 사용만이 문제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라면 이것은 오직 그것이 다른 것임으로서 이다. 우연적인 관계망들을 두드러지게 하는 김주리의 집들은 무엇인가를 표상하거나 기호화하거나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저것 긁어모아 잘 꾸려가 나가고 있는 그것들은 레비 스트로스가 말한 브리콜라주의 특성을 띈다. 브리콜라주는 여러 가지 특성이 잘 결부되어 있는 하나의 전체라고 정의된다. 즉 그것은 ‘다양하고 모양이 기괴하지만 제한된 자재와 규준의 소유요, 단편들을 항상 새로운 단편화 속에 들어가게 하는 능력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생산하는 작업과 생산되는 것, 도구 전체와 만들어지는 것 전체가 구별할 수 없게’(레비 스트로스) 된다. [앙티 외디푸스]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브리콜라주로서의 장소는 인간도 자연도 없으며, 오로지 이것이 저것을 혹은 저것이 이것을 생산하고 연결시키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나와 나 아닌 것, 외부와 내부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다. 욕망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그리고 끊는다. 김주리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것은 표류나 탈주처럼 이어지는 연결이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이접(離接)들은 임박한 붕괴에 대한 저항력을 형성할 것이다.